자기소개서 속 슬픈 자화상
기업마다 요구하는 자기소개서
비전·인재상 묻는 거창한 질문 가득
대부분 경험 고만고만한 취준생들
튀어야 뽑힌다며 꾸며 쓰기 급급
“결국 소개 아닌 소설” 세태 씁쓸
소설(小說)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이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다. 사실을 근거로 삼았건 말았건, 결국 허구로 꾸며낸 이야기인 셈. 그리고 우리는 소설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른다.
최근 들어 취업준비생들을 작가에 빗대 부르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취업을 위해 반드시 내야 하는 자기소개서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소서라는 줄임말과 비슷한 발음으로, ‘자소설(自小說)’로까지 불릴 지경이다. 사실과 다른, 조금은 과장된 허구의 사실로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만들어낸다는 일종의 비아냥이자, 스스로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다. 올해 하반기 공채에 자기소개서를 써야 했던, 자의 혹은 타의로 작가가 되어야만 했던 취업준비생들의 솔직한 속내를 들어봤다.
●거짓말 하고 싶은 사람 있겠습니까
취업준비생 김모(28)씨는 “올해 자기소개서만 26개를 썼는데 모두 떨어졌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기소개서가 자소설로 불리는 게 내심 싫었던 김씨도 처음엔 최대한 진심을 담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자기소개서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도 결국엔 “작가의 길을 걷게 되더라”고 했다.
“한 두 번 떨어지다 보니 불안해지고 결국 자기소개서를 쓰는 여러 가이드를 보게 되더라. 다 쓴 자기소개서를 보니 ‘이게 나인가’ 싶었다”고 김씨는 고백했다.
16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9.0%였던 청년(15~29세) 실업률은 올 6월 10.2%까지 껑충 뛰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른 직장을 구하는 취업준비자와 입사시험 준비생 등 실업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실상의 실업자까지 고려한 체감실업률은 더 높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1~8월 체감실업률을 22.4%로 추산하기도 했다.
그만큼 취직을 하고 싶은 청년들의 마음이 절박하다는 얘기고, 자기소개서가 소설로 불릴 정도로 과장되고 부풀려지는 건 결국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라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김씨는 “대부분 회사가 지원 동기를 묻는데, 솔직하게 답하기 가장 어렵다”고 털어놨다. 평생 관심이 없던 회사였다가 취업을 위해 지원한 건데, 지원자 입장에서는 최대한 ‘회사와 자신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드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자기소개서에는 그 제품을 주문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쓰기까지 했다”고 했다. 김씨는 “자기소개서에 당신네 회사 제품이 너무 안 좋았다라고 솔직하게 쓸 수 있는 지원자가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자소서'라고 쓰고, '자소설'이라 읽는다. Pixabay.
●대필도 좋다.. 붙기만 한다면
이공계열을 전공한 취업준비생 정모(29)씨는 얼마 전 올 하반기 채용 기간에 자기소개서 대필 사이트의 문을 두드렸다. 대필이라고 하면 자서전을 쓰는 유명 인사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주변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2만~3만원만 주면 이력서를 써주고, 10만원이면 하루 만에 자기소개서에다 취업을 위한 일련의 계획서까지 나왔다.
자기소개서를 받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훌륭했다. 기본 프로필만 전해줬을 뿐인데, 기업이 원하는 맞춤 인재가 된 것만 같았다. 정씨는 “내 인생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걸 포장하는 건 역시 전문가의 몫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정씨는 대필 사이트를 찾은 걸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소개서에 담긴 내용은 분명 내 인생”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물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린 게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걸 지어낸 소설은 아니지 않냐”며 “오죽했으면 돈을 내면서까지 대필을 받아야 했겠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이었다”고 반문했다. 정씨는 올해 하반기 20여개 기업에 취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낙방하고 말았다.
취업 시즌에 자기소개서 대필 사이트를 찾는 사람은 정씨만이 아니다. 지난해 취업포털 인크루트에서 472명의 취업준비생과 대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자기소개서 대필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77.3%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 중 실제로 몇 명이 대필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10명 가운데 7명이나 긍정적인 대답을 한 것이다. 실제 한 대필 사이트 관계자는 “한 달에 300~400명이 신청을 해 온다”고 말했다. 이 사이트의 지난 11월 신청자는 390명이었다.
●눈에 띄려면 과장은 필수
라디오PD를 준비 중인 이모(30)씨는 “(지원) 회사의 비전이나 인재상을 보고 자신이 어떤 면에서 맞는지 쓰라는 문항 같은 것은 황당하기만 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지원자가 엄청나게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차별성 있는 답이 나올지 의문이다”며 “남들보다 눈에 띄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무리해서 거창하게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라는 얘기다.
이씨는 “특히 지원 동기를 쓰려면 마치 어느 한 순간에 극적으로 결심을 하게 된 것처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외국에 몇 개월 놀러 갔던 경험이 있다면 정말 놀고 온 것일 뿐인데 마치 그 곳에서 외국인과 몸으로 부딪혀가면서 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둥 뒤늦게 명분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걸 보고 소설이라고 한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올해 22개 자기소개서를 썼다는 한 대학생은 “자기소개라는 게 내가 드러내고 싶은 내 모습은 쓸 수 없고, 그들(기업)이 원하는 답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자기소개서를 통해 나를 보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틀에 맞추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자기소개서는 그래서 저에게 꽉 끼는 코르셋(속옷)과 같아요.”
남상욱기자 thoth@hankookilbo.com
김주리 인턴기자(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3)
[ⓒ 한국일보(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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