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엔 산이 서 있고 오른쪽엔 내가 흐른다. 전북 고창 질마재길 초입이다. 길을 걸으며 갈 길을 생각한다. 누렇게 몸을 바꾼 갈대가 서로 의지하며 흔들린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한다. 올해가 저물어도 새해는 다시 찾아온다. 길은 여럿. 누가 말하나, 이 길뿐이라고. 인간은 노력하는 한 길을 잃고 헤매기 마련이다. 다시 길에서 길을 찾는다. 시인 서정주가 고향 질마재에서 신화(神話)를 길어올렸던 전북 고창 '문학의 길', 그 옛날 고려가 몽골 침략에 맞서 싸웠던 강화도 '역사의 길', 제주에서 시작해 이웃나라 일본 규슈(九州)까지 건너간 '힐링의 길' 올레까지 길을 걸었다. 길을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오른쪽 사진)/사진작가 김진석
전북 고창 풍천(인천강)에서 질마재길은 시작한다. 풍천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강의 하구를 뜻하는 말. 하지만 고창에선 이 냇물을 '풍천'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러왔다고 한다. 길 안내 표지판에는 '고창 풍천장어의 '풍천'이 지형을 뜻하는 '풍천'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꽃무릇쉼터'라고 적힌 표지판 방향을 따라 걷는다. 왼쪽은 산(山), 오른쪽은 내(川)다. 한때 푸르렀을 갈대가 누렇게 몸을 바꾸고 서로 의지하며 냇가에 늘어서 있다. 나무 계단 이어진 산길로 접어든다.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 500m 정도 이어진다. 땀이 난다. 두꺼운 겨울 재킷을 벗어 가방에 넣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마른 낙엽 쌓인 산길을 내려가자 탁 트인 호수가 나타났다. 연기제(堤)라는 저수지다. 왼쪽 호변(湖邊)을 따라 걷기로 한다. 평탄한 시멘트 포장도로다. 가쁜 숨이 금세 잦아든다. 제방 아래로 고인돌이 있는 마을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았다. 산에는 솔숲이 푸르다. 호변엔 가시덤불, 노란 수염을 늘어뜨린 갈대, 감나무 한 그루, 파릇파릇한 대나무 숲이 이어진다. 인기척을 느꼈을까. 수십 마리 새들이 수면을 스치며 떼 지어 날아올랐다.
호수 길 중간 연기사지(址) 푯말에서 소요사 입구 방향으로 간다. 연기사는 통일신라 또는 고려 때 선운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연기제가 생기면서 터만 있던 연기사는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소요사 입구까지 약 1㎞는 다시 가파른 산기슭 길이다. 조금 익숙해져서인지 먼저보다 힘들지 않다. 내리막이 나타나는 곳에 비석도 없는 무덤 봉분 두 개가 나타난다. 그 옆에는 휜 모양 그대로 나무를 잘라 만든 정자가 서 있다. 얕고 평평하게 땅 위로 몸을 드러낸 바위 위에 기둥을 세웠다. 잠시 앉아 땀을 식힌다.
질마재의 '질마'는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 등에 얹는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다. 서해 바닷가에서 소금 농사를 업(業)으로 하던 사람들이 부안 장터에서 곡물과 바꾸려고 이 고갯길을 넘었다. 100년 전(1915년 음력 5월 18일)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미당 서정주는 질마재에 전하는 이야기를 시집 '질마재 신화'에 담았다. 첫날밤 남편의 오해로 버림받은 새색시가 그 모습 그대로 수십년간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애처롭다. 미당 생가는 초가집으로 재현했다.
흙담에 ‘철수♡영희’ 같은 낙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랑은 둘만이 간직할 때 더 깊어질 것을….
‘미당시문학관’에 들른다. 초등학교(봉암초교 선운분교) 건물을 개보수해 2001년 개관했다. 미당의 시집과 친필 편지 등을 비롯해 ‘자화상’ ‘국화 옆에서’ ‘푸르른 날’ 같은 대표 작품을 전시했다. 집필 공간이었던 서재도 재현했다. 미당의 생전 처신을 문제 삼는 이들도 많다. 전시실에는 일제 말기 그가 썼던 친일 성향 시와 산문도 함께 걸었다. 동료 시인들의 평가도 적어놓았다. 시인 김춘수는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고 했다. 고은은 “서정주는 시의 정부(政府)”라고 평가했다. 전시물을 보면서 고통스러운 우리 역사와 문학을 한동안 생각했다. 문학관 5층 옥상 전망대에 올랐다. 논밭이 낮게 이어진 마을과 서해 바다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길은 다시 풍천으로 돌아온다.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원점(原點)으로 그저 회귀한 것은 아니다. 조금은 튼튼해진 다리 근육과 찬바람 쐰 머리는 처음보다 훨씬 단단하고 맑아졌다. 풍천에 있는 안내판에는 ‘질마재길 총길이 11.64㎞, 2시간50분 코스’라고 적혀 있는데 느린 걸음이었는지 5시간 가까이 걸렸다.
질마재길은 고창군이 지정한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의 제3코스다. 풍천에서 연기제→소요사 입구→질마재→미당시문학관→죽염 공장→연기마을로 이어진다. 제2코스인 복분자·풍천장어길(8.18㎞), 제4코스 보은길(19.83㎞)도 풍천에서 시작할 수 있다. 제1코스는 풍천장어길에서 이어지는 고인돌길(8.89㎞). 내비게이션 창에 ‘강나루 풍천장어’를 검색하면 풍천 출발점 표지판 앞으로 데려다 준다. 고인돌박물관에서 출발하면 1~4코스 ‘100리 길’을 모두 걸을 수 있다.
고창에서 ‘풍천장어’를 먹지 않을 수 없다. 풍천 입구에 원조를 내세우며 장어를 파는 음식점이 여럿 늘어서 있다. 풍천 변에 있는 연기식당(063-562-1537)에서 갯벌장어(1인분 3만4000원) 소금구이와 양념구이를 1인분씩 시켰더니 작은 철판에 각각 구워서 내온다. 쫄깃한 식감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상추에 생강과 양념장을 곁들여 싸먹는 맛이 좋았다.
[고창=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